세조 때 창원읍성을 쌓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창원은 절제사 군영과 아주 가깝고 절제사 군영의 성곽이 넓기 때문에 따로 읍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있어 결론이 나지 않았다. 창원의 경우 당시 군자감 창고는 군영의 성곽 안에 있었으나 의창은 부에 있었으므로 군영의 성곽 안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 후 창원읍성은 1476년(성종 7)부터 쌓게 되었고, 1477년 10월에 읍성을 완공했는데, 높이가 12척 7촌이고, 둘레가 4,410척이었다.
창원 읍성 인근 주변 지역에는 역사문화 자원 및 근대문화유산 건축물을 위치하고 있다. 이를 활용하여 창원 역사 마을길을 조성 할 수 있다.
현재 소답동과 용강마을을 잇는 폐터널이다. 경전선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철도가 있었으며, 현재는 철로는 없어진 상태지만 역사마을길 조성 초입부로 안내 전시관 등으로 활용이가능하다.
1940년대에 근대 한옥 양식으로 건립한 주택이다. 아파트 빌딩 숲에 고풍스럽게 자리 잡고 있으나 마당 한가운데로 도로가 뚫리면서 'ㄷ자형‘ 집한채가 허물어 졌다. 전통적인 형태에 현대적인 주거 요소를 가미한 건물로 비례의 미를 나타낸다.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131-14번지에 있다.
김종영생가 마당 한가운데로 도로가 뚫리면서 사랑방 역할을 하던 사미루(四美樓)가 뚝 떨어져버려 마치 별개의 집처럼 되었다. 대문채인 사미루와 사랑채에 해당하는 별채가 ‘ㄱ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705년(숙종 31) 읍(邑)을 옮기자는 논의가 있어 향교를 부(府)의 서쪽 청룡산 아래로 옮겼다.
창원읍성 동헌앞에 우샘,향교옆 좌샘, 객사앞 북동샘, 남산앞에 대밭샘이 있었으나 우샘은 초등학교 확장시 좌샘은 철로로 대밭샘은 아파트 건축으로 없어지고 현재 북동샘만 남아 있다.
고향의 봄 이원수 선생은 1911년 11월 17일 경남 양산에서 태어 났으며, 1912년 9월 10일 생후10개월 되던 때 경남 창원읍 중동리 100번지로 이사를 하였다. 1921년이 될 때까지 소답동에서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재래시장으로 2001년에 현대식 건물로 다시 지었다. 대지 면적 4,100㎡, 건축연면적 6,473㎡로 매장 면적 3,178㎡이다. 현재 소답동의 전통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해발 100m 정도의 구릉에 청기 시대에서 삼한시대에 걸쳐 형성된 취락유적인 남산유적이 있다. 창원의 오래된 역사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지금은 시민들의 체육, 유식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2003년 1월 고향의봄도서관 내에 건립하였고, 도서관 지하 1층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이원수문학관> 온라인 홈페이지도 운영 중이다. 한국 근대문학과 아동문학의 선구자인 이원수(李元壽, 1911~1981)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2003년 12월에 건립하였다.
최종수정일 : 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