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선생(1501-1572)은 1501년(연산군 7년)에 합천군 삼가면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젊었을 적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로 가서 산해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힘쓰다가 다시 삼가로 돌아와 뇌룡정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을 닦는 데에 정진했다. 그러다가 61세에 산청 땅으로 들어왔다. 그가 고향에서 산청으로 넘어온 까닭은 지리산이 그의 학문의 바탕처럼 의로운 기상을 간직한 산인 데에 있었다고 한다.
남명 선생은 천왕봉으로 치닫는 지리산의 자락들이 겹겹이 에워싼 시천면 사리에 산천재를 짓고 본격적으로 후학을 기르는 데에 마음을 쏟았다. 그때에 이미 멀리 조정에까지 그 학문의 뛰어남이 알려져 있었던 터라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끝내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서 일흔 한 살에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이 추증되었으며, 다시 광해군 7년(1615)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정의 시호가 내려졌다.
퇴계 이황이 인(仁) 곧 어짐을 받드는 학문을 했다면, 조식은 의(義) 곧 의로움을 받드는 학문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조식이 산천재에서 길러낸 제자가 백여명 가량이었는데 그중에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으로 목숨을 바친 이가 절반이 넘었던 사실은 그의 학문이 의로움을 받드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조식의 제자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의병장은 홍의장군 곽재우이다. 남명의 대쪽같은 기개가 아직껏 스며있는 듯한 산천재는 발 아래 덕천강의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가는 지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세칸짜리 기와집인 이 집에는 그가 남긴 문집의 책판이 보존되어 있으며, 뒤에는 그의 신도비와 무덤이 있다. 한편 산천재에서 가까운 시천면 원리에는 그의 제자인 정인홍, 최영경 같은 이들이 그를 기려 세운 덕천서원이 있다. 그러나 본디 있던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고, 20세기초 산청지방의 유생들이 새로 지은 것이 오늘날의 건물이다. 현재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에는 산천재(山天齋), 덕천서원(德川書院), 세심정(洗心亭), 별묘(別廟), 신도비(神道碑), 묘소(墓所) 등이 있다.
경남 진주에서 버스로 고령군으로 접어들면 월담 정사현 유적지가 나타난다. 이 월담 정사현 유적지는 남명의 자형인 정사현의 비석 및 묘소와 남명의 누이 조씨 부인의 묘소가 있다. 남명은 이 지방에 자주 와서 월담과 교유하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근처에 영남 사림의 총수 점필재, 김종직의 종택도 있는데 굶어 죽어도 선비정신은 버리지 않듯이 빠듯한 종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남명과 퇴계의 시가 마주 걸려 있는 합천의 함벽루는 황강의 물줄기를 끼고 세워진 누각으로 남명의 함벽루라는 시도 있어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서 벗어나서 남명이 합천 군수 이증영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썼다는 이영공유애비가 있다.
남명의 자취가 살아 숨쉬는 뇌룡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어린아이 하나가 지나갈만한 좁은 문을 들어가면 담장에 둘러싸여 있는 네모 반듯한 아담한 뜰과 정자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신명사도와 똑같은 뇌룡정의 구조가 눈, 입, 귀로 나 있는 세 개의 관문을 지킴으로써 인욕을 막고 자기 내면의 의식을 깨끗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남명 조식선생의 뜻이 담겨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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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