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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관광

석대산

석대산의 파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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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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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산청군 단성면 호암로  길찾기
  • 관리기관산청군 문화관광과
  • 문의전화055)970-6421
  • 편의시설
    장애인편의시설 놀이시설 수유실 유모차 자전거 와이파이

상세내용

석대산 아래 운리의 단속사는 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절을 처음 세운 데 대하여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덕왕 때의 어진 신하 신충이 서기 763년(신라 경덕왕 22년)에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웠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동서별기』에 서기 748년(경덕왕 7년)에 대나마 벼슬을 지낸 왕의 총신인 이순이 조연소사를 고쳐서 단속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그 것이다. 어느 설이 맞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단속사는 지리산 중에 있었던 이름 높은 신라 고찰로서 고승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 신행선사, 대감국사, 진정대사는 각각 그 덕을 기린 비가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지금의 청계리 용두마을 뒤쪽에 있는 석벽은 옛날에 단속사로 들어가는 천연 석문으로서 그 곳에는 광제암문이라고 새긴 커다란 글씨가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이것은 서기 995년(고려 성종 14년)에 이 절의 스님이 쓰고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드물게 보는 명필이다.(옛날에는 최고운 선생의 글씨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절은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고, 서기 1568년(조선 선조 원년)에 유생들에 의하여 불상 경판 등이 부서지고 황폐해졌다가 1597년(선조 30년) 전유재란 때에 왜적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고 말았다. 그 뒤 선각스님에 의하여 일시 중건되었으나 끝내 천년의 법등을 이어온 영화를 폐허에 남긴 채 아직도 중건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489년에 쓴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여사에서 북으로 비탈길을 밟고 3, 4리쯤 가니 계곡의 입구가 나왔다. 깎아 새운 바위가 입구에 우뚝 섰고 표면에 광제암문이라고 쓴 네 글자가 새겨졌는데 글자의 획이 매우 굳세어 보였다. 전해오는 말로는 최치원의 솜씨라고 한다. 5리쯤 가니 뽕나무밭이 보이고 그 사이에서 연기가 올랐다.
시내를 건너 1리쯤 더 가니 간나무가 둘러서 있고 그 뒷산에는 온통 밤나무가 무성해 있었다. 길옆에는 높고 견고한 담이 빙 둘러쳐져 있는데 담 안의 건물은 장경판각이었다. 담의 서쪽으로 백보쯤 걸어가니 울팡한 숲 속에 절이 있는데 그 편액에 지리산 단속사라고 하였다. 절 문 앞에 대감국사의 행적비가 있었는데 고려의 평장사 이지무가 비문을 지었고 대정연간에 세운 것이었다.
절안으로 들어가니 고색 창연한 불전 벽에 면류관을 쓴 두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스님이 설명하기를 신라 때 이순이라는 사람이 벼슬을 사퇴하고 이 절을 세워 단속하라 하였고, 그림은 그 주인공의 상인데 판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스님의 설명을 대충 듣고 행랑채를 돌아서 긴 집의 추녀를 끼고 아래로 50보쯤 나아갔는데 거기에 매우 웅대한 누각이 있었다. 누각은 오래되어 기둥과 대들보가 썩어 위태로워 보였으나 올라가 볼 수는 있었다.
누각의 난간에 기대어 앞뜰을 내려다보는 곳에 몇 개의 가지를 벌린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정당매라고 하였다. 그 내력인즉 문경공 강맹경의 조부 통정공이 소년 시절에 이곳에서 독서하면서 심었는데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올랐다하여 이러한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 시내를 뛰어 건너가니 가얌나무가 무성한 곳에 비석이 있었는데 비는 신라 병부령 김헌정이 비문을 지은 신행선사의 비로 당 원화 8년(813)에 세운 것이었다. 빗돌이 조잡하고 높이도 대감국사비만 못한데 글자가 마멸되어 몇 자는 읽을 수가 없었다. 북쪽 담 안에는 주지가 거처하는 정사가 있엇는데 그 둘레에는 산다 나무가 많았다.
그 집 아래에는 시령달만 하였다. 스님의 말이 여기에 천불의 상을 만들어 달 것이라고 한다. 집들이 매우 헐어서 거처하지 않는 것이 수백 간이나 되었고 동쪽의 행랑에는 500여 개의 석불이 있었는데 그 형상이 각기 다르고 괴상하여 이를 다 설명하여 쓸 수는 없다. 주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절의 내력을 살펴보니 흰 닥종이 세 폭을 이었는데 찧어 다듬은 솜씨가 지금의 자문지와 같이 정교하였다. 그 종이의 한 폭에 서명하기를 국왕 왕해라 하였으니 고려 인종의 이름이고, 둘째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이라 서명하였으니 곧 의종의 이름이다.
내용은 정월과 보름에 대감국사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였다. 그 셋째 폭에는 대덕이라 썼고 하나는 황통이라 했는데 대덕은 성종의 연호이다. 그 시기를 상고해보니 연대가 맞지 않는다. 아마 금태종의 연호일 것이다. 인종과 의종 부자가 이적의 연호를 이미 사용하였고 또 선과 불에 정성을 지극히 다하였으나 인종은 이자겸 때문에 곤욕을 당하였고, 의종은 상장군 정중부의 난으로 거제에 쫓겨가는 액을 면할 수 없었으니 불교가 개인과 국가에 이익됨이 없었음이 이와 같다 할 것이다."
김일손의 글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또 좀이 먹은 푸른 비단에 쓴 글이 있었는데 그 서체는 왕희지의 서체를 닮아 마치 놀란 기러기가 나는 것 같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다. 이 밖에 누런 비단과 자색 비단에 쓴 것도 있었으나 모두 푸른 비단의 것만 못하였고, 더욱이 문장이 짧고 끊어져 글의 뜻을 알 수 없었다.
또 조정의 여섯 부에서 합동으로 서명한 붉은 색의 칙서 한 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집첩 같은 것으로 이것 또한 반이나 떨어져 없어져 가고 있었으나 옛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만하였다. 이 곳의 석해 스님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가 되었다.(후략)" 이상의 탁영이 쓴 글을 통해서 당시의 절 규모를 대략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절은 그 규모가 대단하여 숱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절의 전성시기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광제암문에서 메투리를 갈아 신고 절을 한바퀴 돌아 여러 암자를 거쳐 나오면 벗어둔 짚신이 썩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아침, 저녁으로 절에서 쌀을 씻는 뜨물이 10리 밖의 냇물에까지 비쳤다고도 한다.

규모
  • 신라고찰 단속사를 품은 기암괴석의 산
  • 높이 : 534.5m
등반안내 : 산행시간 (3~4시간소요)
  • 안개당에서 2km를운행하면 갈림길이며 잡목숲을 헤치고 1.5km나가면 정상이나온다.
    정상에서 북쪽은 옹석봉,서쪽은 감투봉, 이방산,구곡산,천왕봉이 조망되고 동쪽은 백마산성이 보이며 원점휘귀 거리는 6km임.

교통정보

현지교통 : 진주시외버스주차장에서 청계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입석리 안계당마을에서 하차




  •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IC→남사마을→입석마을(지방도1001번)→안계당마을→석대산


  • 국도3호선 : 신안면 원지→단성면 남사(국도20번)→입석마을(지방도1001번)→안계당마을→석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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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락처 : 055-211-6051

최종수정일 :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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