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당(今是堂)은 조선조 명종(明宗)때 승지(承旨) 로서 학행이 높았던 금시당 이광진(李光軫 : 1513~1566년)선생이, 만년에 은퇴하여 학문을 닦고 수양을 하기 위해 1566년 (明宗 21년)에 창건한 별업(別業)의 정당(正堂)이다. 창건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므로 1744년(英祖 20)에 선생의 5대손 백곡(栢谷) 이지운선생(李之運)이 복원(復元)을 했는데, 현재의 건물은 선생의 10대손 무릉옹(武陵翁) 이종원(李鍾元) 과 11대손 만성(晩醒) 이용구 (李龍九)가 문중의 뜻을 모아 1867년(高宗 4년)에 원래의 건물을 해체하여 크게 중수(重修)를 하였다. 건물의 제도는 정면 4칸, 측면2칸에 소로수장(小爐修粧)의 팔작형(八作形)지붕으로 좌우에 각각 2칸 규모의 개방된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하였다.
백곡재(栢谷齋)는 조선조 영조(英祖) 때 재야(在野)의 선비로서 명망이 높았던 교남처사(嶠南處士)백곡 이지운(李之運 : 1681~1763년)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문중의 결의로 그 6대손 만성 이용구가 주관하여 1860년(哲宗11)에 세운 재사(齋舍)이다. 그 제도와 양식 및 규모는 금시당과 대체로 동일한데 온돌방과 마루의 배치가 반대방향이다.
금시당과 백곡재는 기둥의 결구(結構) 방식이 특이한 조선시대 후기의 전통적인 건축물로, 주변의 자연환경과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영남지방 사족(士族) 가문의 전형적인 정자 건물이다. 이 별서(別墅)는 밀양의 여주이씨(驪州李氏) 문중의 대표적인 선세유적(先世遺蹟)의 하나로 , 경내에는 위의 두 주 건물 외에도 관리사(管理舍) 및 정문 (正門) 중문(中門) , 남문 (南門) 등 별도 건물이 있어 사용공간을 구획하였다. 특히 남문안 정원에는 금시당 선생이 손수 심은 440년 수령(樹齡)의 압각수(鴨脚樹)(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어 밀양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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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3-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