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 1365년(공민왕 14)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일명 남장대) 남단 강쪽에 임한 벼랑위에 자리잡은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八作) 의 와가(瓦家)인데 이 성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로 주장대(主將臺) 라고 하며 성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장대(南將臺) 또는 향시(鄕試)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장원루라고도 한다. 고려 말 부사(府使) 김중광(金仲光)이 창건 했다고도 하고, 진양지(晉陽誌) 에는 고려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에 신축 하였다고도 한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領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촉석루라는 이름은 진주성의 옛 이름인 진주읍성, 촉석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제 촉석루는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확실한 역사적 기록으로는 고려 말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며 진주성을 쌓을 때에 그 성의 동서남북에 누대 네채를 만들었는데 남쪽에 세운 남장대가 바로 촉석루가 된 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 된 것을 1618년(광해군10년)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하였고, 6.25전쟁 전까지 촉석루는 국보 제 276호로 지정 돼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6.25 사변 때 축대만 남은 채 불타버렸고 1959년에 진주 고적 보전회를 통하여 1960년 5월에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중건한 촉석루는 아랫기둥이 원래와는 달리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진주성 안에 들어서면 촉석루가 맨 처음 눈에 띄는데 다락은 2층 높이에 앉혀져 있으며, 영남 제 1의 자태를 뽐내는 누각으로 현재도 한국의 3대 누각중의 하나로 손 꼽힐 정도로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 촉석루는 경남 진주시 본성동에 남강가 바위 벼랑위에 장엄하게 높이솟아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촉석루 뒷뜰에 있는 의기사와 촉석루 밑에 있는 의암바위, 진주성안의 국립진주박물관이 있어 쉽게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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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3-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