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왕릉은 한때 잊혀지고 있었던 것을 다시 찾게 되었다고 하는데 왕릉을 다시 찾은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200년전에 왕릉의 위쪽 산속에 왕산사(王山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내려오는 길에 비를 만나 왕산사(王山寺)에 들러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왕산사(王山寺)에는 언제인가 부터 법당 들보위에 커다란 나무궤가 하나 얹혀 있었는데 누구도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냥 손댈 수 없는 것으로만 전하여 지고 있었다.
그런데 비를 피하는 일행중에 민경원(閔景元)이란 분이 있었는데 평소에 담력이 세서 꼭 그 목궤를 내려 볼려고 하였더니 주지는 물론 일행 모두가 강력히 만류하였는데도 끝끝내 이를 물리치고 신비에 쌓인 궤를 내려서 열어보기에 이르렀다.
그랬더니 그 속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그리고 활과 칼같은 유물이 나왔고 또한 명승(名僧) 탄영(坦瑛)의 왕산사기(王山寺記) 등이 나와서 이를 고증하여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자손들이 수축(修築)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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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