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 번호 : 전통사찰 제69호
의곡사는 비봉산 동쪽 승경이 매우 아름다운 계곡에 있다. 『진양지』에 의하면, "광해군 10년(1618)에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산승 성간(性侃)으로 하여금 중건토록 했다"고 하였는데 『진양속지』의 『임관목사(任官牧使)』조에 의하면 현종 12년(1671)에 도임한 진주목사 김하양(재임:1671∼1673)이 세웠다고 하였다. 이것이 의곡사에 대한 최고(最古)의 기록이다. 광무 2년(1898)에는 석종(石宗)이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진주시 발행의 『내고장 전통』과 『전통사찰』조에는, 신라 문무왕 5년(665) 2월에 혜통조사(慧通祖師)가 창건하고, 애장왕 9년(808)에는 원측선사(圓測禪師)가, 고려조 명종 24년(1194)에는 월명선사(月明禪師)가 각각 중건했다고 하였으나 『삼국유사』및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혜통(慧通)은 혜통(惠通)의 잘못이고, 원측(圓測:613∼693)은 혜통(惠通)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며, 월명(月明)은 신라 경덕왕(재위 742∼764)때의 인물이니, 그 기록은 실로 믿기 어렵다.
그리고 혜통(惠通)은 문무왕 초에 당나라에 갔다가, 동 5년(665)에 견당사 정 공(鄭 恭)과 함께 귀국하여 왕망사에 있었고, 원측(圓測)은 진평왕 49년(627)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건너가 당의 태종으로부터 도첩을 받고, 그곳 불교계의 대표적 역할을 수행하던중 뒷날 신문왕이 귀국을 청했으나 돌아오지 않고, 효소왕 5년(696)에 84세로 입적하였으며, 월명(月明)은 경주의 사천왕사에 있으면서 도솔가와 제망매가 등의 향가를 지은 분이니, 이들 혜통조사.원측.월명선사가 진주에 와서 의곡사를 창건 또는 중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과장된 것이다.
더욱이 의곡사는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전하는 바가 없을 뿐더러, 그 곳에는 신라.고려시대의 유물이 한 점도 없으니 『내고장 전통』과 『전통사찰』조에서 말한 것은 모두 믿기 어려운 것이다.
의곡사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최종수정일 :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