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사는 신라의 성인 원효 대사와 함께 쌍벽을 이룬 의상 조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 곳 종남산에서 지엄 선사로부터 화엄의 오묘한 뜻을 깨닫고 귀국하여 화엄대의를 선양하면서 국내의 영지를 가려서 불찰을 많이 세워 화엄십찰이라고 일컬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옥천사이며 그 창건 연대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이다.
신라 최고운 선생이 「해동의 화엄대학이 십산이 있으니 중악 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북악의 부석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와 보광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 갑사삭주의 화산사, 양주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이다.」라 하였고 또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에도 「이웃 고을에 같은 이름인 옥천사가 있으므로 쌍계사라 바꾸었다」라 하였기에 그 연원이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일천삼백년이나 된 옥천사는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6차례의 중창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로 중창이 힘들었던 것은 국가의 숭유억불정책이 가중되었기에 한동안 도둑의 소굴로 변했다 한다.
아무리 형세가 변했다 하더라도 천혜의 영지가 오랫동안 빈터로 있을 수는 없었다. 인조 17년(서기 1639)에 학명 대사가 대둔리 촌락에서 유숙하다가 신인이 지시하는 곳에 대가함의 도국이 나타나는 영몽을 꾸고 다음날 이 곳을 찾아 명당의 절터를 알고 의오 대사와 힘을 합하여 7번째의 중창을 시작하였다.
이 때 건립한 것으로는 인조 22년(1644)에 동상당을 세웠고 같은 23년에 심검당을 세웠으며 효종 5년에는 법당과 궁선당을 세우고 현종 5년에는 성요, 승안, 돈계화상 등의 원력으로 정문을 건립하여 그 규모를 확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옛 신라 고찰의 맥을 잇고 면목을 갖추었더니 그 뒤 숙종 3년에 묘욱 선사가 법화외사를 열고 대중을 모아 묵루각, 향적전, 만월당을 세웠다. 다음 해에는 관음전, 청계당, 옥련암을 세웠으며 한 해 넘어서는 동상당을 중창하고 그 다음에는 승당과 선당, 정문, 시왕전, 백련암을 중창하였다. 영조 40년에는 자방루를 건립하였으니 이것이 8번째의 중창이다.
이리하여 인조에서부터 영조에 이르기까지 가장 번성하여 상주하는 대중이 340여 명에 이르렀고 12개 방앗간에 12대의 물레방아가 가동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로 두 번째의 환란을 입은 천년 고찰에 구제의 손길을 펴신 분은 화농화상이었고 때는 고종 25년이었다.
화상은 난동으로 황폐해진 경내를 정돈하고 적묵당과 탐진당을 중수하였으며 각 암자도 면목을 일신케 하였는데 옥천사의 오늘을 있게 한 위대한 공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를 9번째 중창으로 부르고 있다.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국가 지정문화재 보물495호인 임자명반자, 도지정문화재인 자방루, 향로, 대종, 대웅전 및 소장품 119점과 기념물로 청련암의 찰피나무가 있다. 암자로는 백련암, 청련암, 연대암이 있으며, 옥천사 임자명반자, 괘불, 옥천사 소장품 등 120여 점의 불교유물의 보관관리를 위한 유물전시관(보장각)이 건립되어 연화산 도립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불교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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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