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 이정의 본관은 사천,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이다. 1536년(중종 31)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한 후 성균관 전적, 예조정랑, 선산부사, 청주목사, 우부승지, 형조참의, 좌부승지, 병조참의, 대사간, 호조참의, 예조참의, 경주부윤, 순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저서로는 『구암문집』·『성리유편(性理遺編)』·『경현록(景賢錄)』『논상례(論喪禮)』·『한훤보록(寒暄譜錄)』·『열성어제(列聖御製)』등이 있다. 묘역에는 선생과 부인 심씨, 자 웅인 부부묘 등이 있다. 선생의 묘는 따라 묘단을 두어 부인의 묘보다 한 단 높으며, 두 묘를 위해 다시 묘단을 두었다. 그 아래에 아들 웅인 부부 묘가 있다. 선생의 묘는 묘갈, 상석, 향로석, 망주석이 세워져 있었으나 향로석은 2015년 도난당하였다. 묘갈은 화강암제로 높이 112.0cm, 폭 54.5cm이다. 네면 모두에 이력과 移葬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특히, 임란 때 왜구에 의해 도굴되어 후에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비문은 1658년 미수(眉) 허목(許穆)이 지었다. 묘의 상석은 사암제로 1808년에 놓았으며 망주석은 연화좌에 꽂혀 있는 육각의 모양으로 사암제의 재질이며 결을 따라 박리가 심하다. 부재의 조각이 섬세하고 한 쪽의 것에는 하늘을 오르는 거북이 조각되어 있으며 상석과 함께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최종수정일 : 2020-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