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산(傅岩山)은 스승 부(傅)자를 쓰며 일명 스승바위산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부암산 자락은 너무나 많은 역사를 간직한 산이다. 그리고 악(岳, 嶽)이나 암(岩)자가 들어가는 산은 거의 바위산인데 이 곳 역시 예외는 아니다. 부암산은 멀리서 쳐다보아도 암반 투성이고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역시나 북쪽의 산들은 모두 바위산이다.
부암산 아래 신등면 단계리에는 성웅 이순신 장군이 조반을 들었던 곳이 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보면 정유년 6월 1일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출발해서 오후 늦게 단성면 사월리 박효원의 종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주인은 정성스러웠으나 초막의 잠자리가 불편하여서 날이 새는 대로 길을 재촉하였다. 그래서 6월 2일 늦은 아침나절에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단계천 변이다. 이곳에서 조반을 들었던 것이다. 조반 후에 삼가를 거쳐서 당일로 권 도원수 영에 도착하였다.
합천 초계의 매여실에서 46일 간을 머물다가 칠천량 해전의 참패소식을 듣는다. 권 도원수의 권고로 남해의 전세를 살피기 위해 7월 18일 삼가현을 거쳐서 7월 19일 우중에 이곳 단계천 변을 지나 지금의 신안면 백마산성에 올라서 지세를 살피고 단성현에 들려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비속에 출발하여 하동군 옥종면 강정으로 행하였다.
이 충무공의 일월 같은 충성심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경상남도에서는 1997년 도내의 행로지를 표시하였다. 특히 이곳에는 사적지를 가꾸면서 초모탑을 건립하였다. 충무공은 울돌목에서 전선 12척으로 130여척의 왜적을 대파하고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서 "배는 아직 12척이 남아있고 미신은 죽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진 제독은 추모하는 글에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 감긴 공"이라고 극찬하였다. 단계천 가운데 한 바위가 있는데 그 이름을 기암이라 한다. 바위에는 많은 구멍이 뚫려있는데 옛날에 일산을 꽂았던 자리이다. 단계현 시절에 놀이가 있을 때에 이 곳에서 풍악을 울리고 기생을 불러서 놀이를 하던 곳으로 전한다.
지금은 신안면 구역으로 되어 있지만 지마고개 길 위쪽에는 한정문이 뚜렷이 서 있다. 지나는 이는 누구나 우러러 볼 사연이 있는 포산 곽씨 정려이다. 임진 칠 년의 마지막 해인 정유재란 때의 일이었다. 당시 안의 현감인 존재 곽준의 따님이 이 고장의 유문호에게로 출가하였다. 난을 당하여 이들 부처 역시 의병활동을 위해서 안의의 황석산성에 들게되었다. 그 때가 정유년 8월 16일인데 황석산성에는 곽준 현감과 조종도 전 함양군수의 가족들이 모두 들어와서 성을 지키고 있었다. 밝은 달밤에 벌어진 왜적과의 공방전에서 의병들은 활을 쏘면서 돌을 던지고 부녀자들은 돌과 화살을 나르는 혈전이 벌어졌다.
밤이 깊어가자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그 틈에 북문을 지키던 김해부사 백사림이 성문을 열어주고 도망치는 바람에 굳건히 지키던 성안은 삽시간에 밀려든 왜적과의 접전이 벌어지는 간발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성루에서 분투하던 유문호는 왜적에게 잡혀서 최후를 맞게 되었고, 곽씨 부인은 아버지 곽준 현감과 두 남동생 곽이상, 이후와 같이 장대에 있었다. 그 때 사태가 위급함을 보고 고가준 현감은 두 아들을 불러서 "이제 사세가 위급하니 너희들이 분전한들 사태를 돌이킬 방법이 없게 되었다. 나는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으로서 이 성과 죽음을 같이 할 것이지만 너희들은 성을 물러나서 곽씨 가문의 후사를 잇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아버지의 명을 들은 두 아들 이상과 이후는 한소리로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하실 바를 다하시는데 저희들은 아버지를 사지에 계시게 하고 자식의 도리로 어디로 간다는 말씀입니까? 명을 거두소서" 하였다. 형제가 아버지 앞을 막아서서 밀려오는 왜적을 칼과 창으로 치고 내달으니 달빛에 섬광이 춤추고 피를 뿜고 쓰러지는 왜적이 여럿이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인데다가 역전의 왜적을 당할 길이 없어 힘이 다해서 왜적의 칼에 두 형제가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곽준 현감과 조종도공은 같이 만나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 때 곽씨 부인은 이 광경 을 보고 남편이 있는 성루를 찾아가 보니 이미 유문호공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소란 중에 있는 곳을 찾다가 이미 돌아간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따라온 종에게 "내 아버지와 두 동생이 순절하여도 따라죽지 않았음은 남편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남편마저 돌아갔으니 살아서 무엇하리요" 하고 높은 성벽에서 뛰어 내려 자진하였다. 또한 이상의 처 신씨도 성밖에서 소식을 듣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장렬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곽씨 부인의 정려가 내려 졌는데 동계 권도 선생은 그 비명에다가 "부자녀 일가삼강 충효열 만고가칙"이라고 썼다. 곽준 현감과 두 아들에게도 각각 정문이 내려서 영원히 빛나는 충효지심을 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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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