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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관광

함안무기리주씨고가

함안무기리주씨고가의 파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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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se 코스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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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계절사계절
  • 추천일정1102
  • 여행유형체험
  • 지역
  • 관리기관055-587-8649 / 010-7281-0417
  • 문의전화055-587-8649
  • 편의시설
    장애인편의시설 놀이시설 수유실 유모차 자전거 와이파이

상세내용

무기리주씨고가가 위치하는 무기마을은 옛 칠원현의 주산인 청룡산(작대산)밑에 자리잡고 물 맑고 산세가 좋아 ‘무우기수(舞雩沂水)에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라 하여 판결사 주선원공(周善元公)이 무기라고 지명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고택은 화려한 별당과 연못을 갖춘 대규모 주택이자 종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집으로, 내부의 연못인 무기연당은 함안에서 풍경이 아름답기로 명성이 높다. 이 집은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국담 주재성(菊潭 周宰成)이 1700년대에 지은 주씨 가문의 종가이다. 집의 내부는 정문, 서실인 감은재(感恩齋), 영빈사(迎賓舍), 중문, 안채, 사당인 부조묘가 있고, 동쪽에 중요민속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된 하환정(何換亭), 풍욕루(風浴樓), 국담(菊潭)이 있는 무기연당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 무기연당은 그 아름다움과 함께 조선 후기 연못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집을 처음 세운 국담 주재성은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기제사를 영구히 받들라는 왕명에 따라 부조묘에 봉안된 인물이다. 이인좌의 난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 : 昭顯世子의 曾孫)을 왕으로 추대하고 이인좌를 중심으로 과격 소론파가 일으킨 역사적 사건이다. 이 고택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는데 사랑채는 국담의 장남 주도복의 서재로 문집과 책판이 보관되어 있고 대청 북쪽벽에는 초상화를 모셔 두었던 영정각이 남아 있다. 정문에는 국담의 충성심에 대한 공훈과 아들 주도복의 효행에 대한 포상으로 철종 10년(1859)에 내려진 ‘충신정려’와 ‘효자정려’가 함께 있으며 이를 ‘충효쌍정려문’이라 한다. 이 집을 세운 주재성(1681∼1743)을 간단히 살펴보면, 자는 성재(聖哉), 호는 국담(菊潭), 주세붕의 후손으로 각(珏)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정희량의 난 때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에 진출, 관찰사 황선(黃璿)으로부터 김해진군(金海鎭軍) 3,000명을 지원받아 영호(嶺湖)의 요새인 분치령(分峙嶺)을 방어하였다. 또한, 그 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하여 가산을 팔아 쌀 300섬을 내어놓았다고 한다. 난이 평정된 뒤 고향에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훈고(訓詁)에 전심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찰사 황선과 암행어사 박문수가 조정에 그를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사후 3년인 1745년에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으며, 1783년(정조 7)에 영남유생의 상소로 정려되고 1788년에 기양서원(沂陽書院)에 제향되었다. 후손들이 선생의 글을 모아 간행된 국담문집을 새긴 목판인 「국담문집책판」은 도 유형문화재 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택의 주변은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많은 개발이 이루어져 아름다운 고택 주변경관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고택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고택과 무기연당이 주는 아름다움과 옛스러움에 순간적으로 취하게 되는 묘미가 있다.

함안무기리주씨고가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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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 문화관광체육국 관광진흥과  
  • 연락처 : 055-211-4611

최종수정일 : 201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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