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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관광

화장산/수양산

화장산/수양산의 파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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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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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산청군 단성면 백운로  길찾기
  • 관리기관산청군 문화관광과
  • 문의전화055)970-6421
  • 편의시설
    장애인편의시설 놀이시설 수유실 유모차 자전거 와이파이

상세내용

화장산 아래 양지바른 국도 변에 충의공신 사헌부집의 양천허공 휘치의 정려사적비가 서 있다. 공은 대대로 벼슬이 이어진 집안에서 태어나 서기 1634년에 문과급제를 하고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관향전관에 임명되어 호조정량이면서 원수부에 종군하여 남한성에 호종을 하였다.

동로에서 적의 기습을 만나 대가가 위기에 처하였는지라 공이 자리를 지켜서 좌충우돌하여 평백동역에 이르니 적의 화살이 비오듯 하였다. 따르던 자가 피할 것을 권유하자 공이 노하여 "호종하는 신하가 죽음이 있을지언정 몸을 피하는 불충을 하란 말인가" 하고 힘을 다해 막아내다가 끝내 적의 칼날에 순절하고 말았다.

그 때가 서기 1637년 정월 20일이었다. 시신도 거두지 못하다가 뒤에 공의 아우들이 수렴하여 장사지냈다. 난 후에 인조왕이 이 사실을 듣고 증 사헌부집의를 제수하고 시호를 언독이라고 내렸다. 1696년 정려를 내려 충주에 전각하였는데 자손이 이 곳으로 옮겨옴에 따라 이 곳에 세우게 되고 영정도 모시게 되었다.

화장산에는 화장암 정려가 있다. 화장암은 『진주지』등 옛 기록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절이 분명한데 해발 600미터의 높은 산 중턱에 좁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암자의 뒤편에 있는 바위틈에서 저녁마다 쌀이 나오는데 바릿대를 받쳐두면 한 사람의 중이 공양을 할 수 있는 분량의 쌀이었다. 산 밑에 마을이 있지만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면서 탁발하기에는 너무도 힘들어 매일 밤 바릿대를 바위 밑에 받쳐두고 쌀을 받아서 어렵잖게 공양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산 넘어 이웃의 한림사에서 중이나 상좌중이 와서 머무는 날에는 두 사람 분의 쌀이 받쳐져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작은 암자지만 중은 흉, 풍년을 모르고 지내면서 불도에 정진하다가 열반을 하였다. 다음에 새로운 중 한 사람이 오게 되었는데 쌀은 변함없이 받쳐져 암자가 평상시대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이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서 마을마다 기근이 자심하였다. 기근이 너무나도 심하여 흰죽배미가 생겨나기도 하였는데 흰죽배미란 논 한 필을 배미라고 하여 흰죽 한 그릇에 바꾸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때에도 화장암에는 쉼없이 쌀이 나와서 어려움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이 쌀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쌀이 나오는 구멍이 아주 좁아서 겨우 쌀 한 톨이 빠져나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 그 중은 구멍을 넓히면 하룻밤에 많은 쌀이 쏟아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흉년에 큰 도움이 되고, 절도 확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단단한 나무막대기를 만들어서 그 쌀 구멍을 넓히게 되었는데 힘들여서 바위를 벌여트려서 쌀 구멍을 넓혀놓고 그 날 밤에 바릿대보다 큰 그릇을 받쳐두고 밤을 새기가 바쁘게 새벽에 달려가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구멍이 넓어졌는데도 쌀은 한 톨도 받쳐있지 않았다. 그 이튿날도 사흘날 밤도 쌀은 나오지 않고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쌀은 영영 나오지 않고 말았는데 가뜩이나 흉년을 만난 중이 부지할 길이 없어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그 길로 절이 퇴락하여 바위만 남게 되었다.

이 근처에는 옛날에 한림사, 백운암, 용문암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칼, 창 등 5점이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점촌마을 서북방 약 1km 지점에 바위가 첩첩히 쌓인 곳이 있는데 속칭 쇠-대-가-리라고 한다. 이 곳에 있는 암굴에서는 금, 은, 동을 채취한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점촌은 당시에 제철을 했던 곳으로 요지와 철산화물 등을 찾을 수 있다.

화장산은 그 높이가 614미터라고 하여 6·14고지로 이름나 있다. 1951년 7월 25일 지리산 공비 이현상 부대가 시천, 삼장 두 지서를 습격하면서 통로인 이 곳 6·14고지를 선점하여 지원부대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경찰병력은 진격을 멈추고 칠정 모퉁이에 작전지휘소를 설치하여 고지 탈환작전을 시도하였다. 지리산 전투사령부와 태백산지구 경찰전투사령부의 합동작전으로 야포로써 포격을 가하고 경찰 1개 중대가 포복으로 접근하여 공격을 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30여명의 전사자만 생겼다.

또 다시 병력 1개대가 증원되고 야포 200 여발을 퍼부은 다음 공격을 가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천, 삼장 두 지서는 고립무원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서 경각간의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 급보를 듣고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밤 11시에 총공격을 가하여 드디어 고지를 점령하고 이어서 시천, 삼장 두 지서를 구출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피아간에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고 그 뒤에는 장기간에 걸쳐서 경찰병력이 이 고지를 지켰다. 태소마을에서 바라보면 앞을 지나는 국도가 산 끝 자락을 넘어가는데 길 아래는 절벽이고 강물은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깊고 푸르다.

여기가 도구대로서 도구 이제신의 사연이 긷든 곳이다. 도구는 남명 선생에게 자주 내왕하면서 입덕문 글씨를 보고 이 석대에서 시를 읊으면서 쉬어가곤 하였다고 한다. 수양산 동쪽 마주 보이는 산봉우리가 돌당산이고 그 아래에 명당이 있다. "천리주령에 만리안대" 라는 이 장군대좌는 자손이 먼 곳에 살아야 잘 된다고 하여 중국에 가서 산다고 하는데 성은 신씨이다. 자손들 중에 누군가가 중국에서 이부상서 벼슬을 하고 나서 이 곳에 다녀가면서 산 아래에 있는 주변의 지명을 바꾸었는데 칠송정을 칠정으로, 용마등을 용무천으로, 방고등을 방개등으로 고쳐 부르게 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덕천강에는 꺽지라는 물고기가 나는데 일곱돈바리과의 민물고기로 한편 꺽저기라고도 한다. 순 민물고기로서 일정한 생활수역을 갖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본 군의 동·서부에서 각각 남으로 질러 흐르는 경호강과 덕천강의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고기이지만 우리 군 외의 지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고기이기도 하다. 몸빛은 회갈색이며 머리 외에 7∼8 개의 윤곽이 확실치 않은 가로무늬가 있다. 성질이 단순 급격하여 낚시로써 낚을 수 있는 고기이고 육질이 단단하여 생회로 즐겨 먹는다. 용암 이천간이 읊은 시에 "복사꽃 따스한 물에 꺽지가 살찌면 강위의 고기 잡는 늙은이는 해질녘에 돌아가네" 라고 하여 이 고장의 명산물임을 일찍부터 자랑하였다. 산청군 고기로 지정되었다.

규모
  • 덕천강 과 어우러진 여름 휴양지
  • 높이 : 612m ,502m
등반안내
  • 단성면 백운리 태소마을을 지나 화장계곡을 따라 오르면 된다.
  • 정상까지의 거리는 2.5 로서 1시간30분 소요된다.
  • 화장산 정상에서 수양산까지 4km이며 수양산에서 사리까지 2km이며 전체 운행시간은 3시간30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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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산/수양산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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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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