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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장수 양산시 전설 펼침메뉴

    징석 13세, 징옥 9세, 징규 6세 대의 이야기이다. 이들 3형제는 서당에서 돌아오다가 양민의 재산을 약탈해 가는 50여명의 도적떼를 발견하자 모두 사로잡았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본 고을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보고 날개가 달린 장사라고 이름하게 되었고, 혼이 났던 도적떼들은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두번 다시 이 고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 고을에는 도적떼로 인한 민폐가 없는 평화롭고 밝은 고을이 되어 고을 사람들은 "방아로구나. 방아로구나. 해가 지면 달님이 뜨고, 달님이 지면 해님이 뜨네" 라고 노래하였다. 이것이 삼장수 민요였는데, 해님과 달님은 삼장수를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삼수리 마을의 유래 수리의 원래 지명은 따로 없고 초산의 일부였는데 1371년 (고려 공민왕) 이징석, 이징옥, 이징규 3형제 장수의 아버지 이전생이 왕명을 받들고 전국을 순찰 도중 이곳 (하북면 삼수리 427번지)에 이르렀을 때 길지임을 발견하고 1380년(고려 우왕6년)경부터 이곳에 정착하면서 3남 2녀를 얻었는데, 훗일 아들 3형제가 모두 무과에 장원급제한 후 종일품의 품계까지 오른 명장수가 되었다. 이로써 마을 이름도 세 장수가 태어난 마을이라고 삼수리라 칭함과 동시에 초산리에서 분리되었다.

  • 원효암의 창건 설화 양산시 전설 펼침메뉴

    지금부터 1,300여년전 원효대사가 장안(長安) 척판암에 있을때 일이다. 하루는 암자에서 서쪽하늘을 혜안(慧眼)으로 바라보니 중국 산둥성에 있는 법운사에 천명의 신도가 불공을 하고 있는데 그 절이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 원인은 그 절의 법교(法敎)가 죄인이므로 벼락을 내려 천벌을 주려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신도들도 억울한 죽음을 당한 형편이었다. 그때 원효대사는 해동원효(海東元曉)라고 새긴 판자를 던지니 갑자기 법운사 주위가 금빛으로 변하였다. 신도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밖으로 뛰어 나오자마자 그 절은 무너지고 천명의 신도는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일컬어 해동원효판구중(海東元曉板救衆)이라고 한다. 이렇게 구원받은 천명의 신도들은 해동원효의 덕망을 찾아 와서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천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천백암쪽으로 가려는데 지금의 하북면 중방리에서 갑자기 산신령이 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나타나 몸과 꼬리로 원적산을 가리켰다. 이상히 여긴 대사는 지금의 내원암으로 가니 동지섣달에 연꽃이 세 송이 피었다고 한다. 거기서 천명의 신도들을 가르치니 식량이 곤란하여 모래불이라는 동네에 갑부가 있어 쌀 한되를 바랑에 넣어 그집으로 동냥을 구하러 갔다. 하인이 쌀 한되를 가지고 나와 부으니 1/4도 못 찼다. 이상히 여긴 하인은 또 한되 또 한되 아무리 넣어도 그정도에 머물자 이상히 여겨 주인에게 고하니 주인은 도사임을 깨닫고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로부터 화엄벌에다 집을 짓고 천명 제자를 가르쳐 성불시켰다. 그 후부터 천성산(千聖山)이라 하고 절을 짓고 원효암이라 했다. 지금도 천성산 이때는 칡줄이 다른곳에 비해 매우 짧다고 한다. 이유는 대사가 제자와 더불어 수도 할 당시 한 제자가 마을에서 동냥받아 오는 길에 칡 넝쿨에 넘어져서 밥쌀을 쏟아버렸다. 이야기를 들은 대사는 그 이튿날 흰 종이를 한장주어 그자리에 버리고 오라고 하였다. 그 이후는 칡줄이 길게 자라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화엄벌에는 바둑판 같이 여러군데 불이 나지 않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원효대사의 제자가 책을 편 장소라고 한다. 원효대사는 여기서 처음으로 화엄경소(華嚴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등을 지어서 불교와 더불어 큰 업적을 남긴 학자이다.

  • 부엉등 산신령의 분노 창원시 전설 펼침메뉴

    진해관광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공원이 조성된 일대를 "제황산"이라고 한다. 고유명은 "부엉등"또는 "부엉산"이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이 산세가 투구를 닮았다고 "가브토산"이라고 하던 것을 광복 후 개칭하면서 제황산으로 하였다. 풍수설에 이르기를 부엉등 북쪽에 제왕이 태어날 명당이 있다고 한다. 임금이 날 산봉우리를 임금이 나지 못하게 일본인들이 눌러서 러.일전쟁 승전 기념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그 탑을 세울 때 산신령이 나타나 탑을 짓지 못하게 현몽을 하였으나 듣지않아 낭패를 보았다는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 산신령의 노여움 ◈ 《첫 번째 현몽》 부엉등에 일제가 러.일전쟁 승전 기념탑의 건립공사를 시작한 어느날, 묘법사(부엉등 동쪽기슭에 있었음) 주지의 꿈속에 백발노인이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나타나 준엄하게 일렀다. "일본해군의 무도한 자들이 나의 머리를 깎아버리니 상처를 입고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다. 일본 해군사령관에게 일러 공사를 중지하도록 해라. 내가 시키는 말을 듣지 아니하면 재앙이 내려질 것이다" 묘법사 주지는 이를 전했으나 사령관은 코웃음만 쳤다. 아니나 다를까 진창선 개설을 축하하는 날 일본인들을 가득 실은 함선이 현동의 부두에 입항하다가 전복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두 번째 현몽》 공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부엉산 산신령은 다시 묘법사 주지의 꿈속에 초조해진 모습으로 나타나서 " 공사를 즉시 중지하고 본래 대로 다듬지 않으면 더 큰 변이 일어날 것이다" 묘법사의 승려가 또 사령관에게 알렸으나 들은 체도 않았다. 그 후 공사현장에서 석재를 가득 싣고 오르던 케이블 5대가 쇠줄이 끊겨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니 중국인 석공과 잡역을 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피해가 전혀 없었고, 일본인 감독과 석공들이 죽고 크게 다치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산신령님의 두 차례의 현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공사를 진행하여 1929년에는 기념탑의 준공을 보았다 《세 번째 현몽》 심히 맥이 빠진 부엉산 산신령이 아주 쇠약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마지막 경고를 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기차에 화재가 발생하고 또 영화관람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일본인 관객 107명이 불타 죽는 끔찍한 두 사고가 일어났다.

  • 범과 싸워 부친을 살린 아들과 며느리 창원시 전설 펼침메뉴

    헌종 때 망덕마을을 살던 서지순은 장정들에게 쫓긴 범이 들에서 일을 하고 있는 부친을 물고 늘어지자 낫을 들고 싸워 그 범을 죽였다. 그런 뒤로 밤마다 마을 뒷등에 범 한마리가 나타나 위협을 하였고 범에게 물린 부친의 상처는 점점 깊이 곪았다. 지순의 아내는 호단을 지어 범에게 치성을 드리며 시아버지의 환부에서 나오는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며 간병을 하였다. 그런 정성어린 노력이 3년 동안이나 이어지자 범도 나타나지 않았고 상처도 아물었다. 철종 때 나라에서 지순은 "호조 참판"으로 그의 아내는 "정부인"으로 추서하고 그들의 효성을 기리는 쌍효각을 세우게 하였다.

  • 왼손바닥의 비밀 창원시 전설 펼침메뉴

    천자봉에는 용이 되지 못한 강철이 살고 있으면서 인가에 내려와 주민을 자주 괴롭혔다. 염라대왕이 사자를 보내어 잡아 오게 하였으나 겁이 나 잡지를 못하고, "용이 못될 바에야 죽어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국의 천자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설득을 했다. 강철은 기꺼이 응하겠다고 머리를 바위에 부딪고 죽고 말았다. 죽은 강철의 입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나와서 백일 마을의 어느 주씨 집에 날아 들어갔다. 그 때부터 그 부인은 잉태를 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무술놀이를 좋아하고 뭇 아이들을 거느리는 장수 노릇을 하면서 왼손은 항상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잠자는 틈에 친구들이 주먹을 펴 보니 손바닥에 "大明"이라는 글자 무늬가 있었다. 그 바람에 소년은 잠을 깨고 비밀을 탄로시킨 친구들을 원망하며 행방을 감추었다. 그가 뒤에 중국에 가서 무술을 닦아 明의 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 성흥사의 창건내력 창원시 전설 펼침메뉴

    신라 흥덕왕 41년에 왜구 10만여 명이 부산과 제포에 침범하여 나라가 어지러웠으나 현명한 방책이 없어 근심하던 왕의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지리산 중에 無染이라는 和尙이 있으니 불가사의한 신력이 있어 천신을 거느리고 다니므로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할 인물이라. 또 서남쪽에 산이 있어 불모(佛母)라 이르고 산명수려하고 상서로운 구름이 항상 떠서 참을 닦는 사람이 찾을 만한 곳이니라." 이에 왕은 느낀 바가 있어 사람을 보내어 화상을 모셔 와 분부를 하시니 화상은 팔판산 철마봉으로 올라가서 금석재를 재(嶺)에 꽂고 왼손으로 배를 두드리니 그 소리가 마치 포성처럼 진동하고 금갑신장이 산을 둘러싸고 나타나는지라 왜구가 놀라 물러나고 말았다. 왕은 기뻐하며 무염화상을 國師로 봉하고 은혜를 갚기위해 구천동 관남리에 절을 지어 "聖興寺"라 하고 사전 360결과 사노 百戶를 하사하였다. 이절은 대강동 뒷산에 옮겨져 있다.

  • 칠분암설화 사천시 전설 펼침메뉴

    가락국 수로왕의 넷째 아들로부터 일곱 왕자는 허왕후의 동생 본복선사를 따라 궁전을 등지고 출가하는데 처음에는 합천 가야산에서 수도하다가 3년 후에는 의령 수도산으로 옮겨가고 다음해는 사천 와룡사와 구룡사에서 수도를 닦고 드디어 지리산에 올라 득도하였다는 설화이다.

  • 천자봉 전설 창원시 전설 펼침메뉴

    집이 가난한 주씨 가문에 총각 보재기(잠수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지내느라고 아버지 시신을 신봉(3년간 땅에 묻지 않음) 해 놓고 매일 바다에서 해산물을 따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때 중국의 한 지리박사가 자기 아버지가 죽자 머리만 잘라서 짊어지고 명당자리를 찾아온 것이 웅천이었다. 산세를 둘러보니 이곳이 틀림없이 천자를 탄생시킬만한 명당인데 바다 속이어서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궁리하던 중 마침 총각 잠수부를 만나 이야기하려고 가까이 갔더니 잠수부 역시 부모상을 당한 표시를 하고 있어서 잘 되었다고 생각한 지리박사는 잠수부를 보고 이 바닷속 밑에 들어가면 미륵(부처님)이 있을 것이니 당신 아버지 머리는 왼쪽에 걸고 내 아버지 머리는 오른쪽에 걸어두면 당신이나 내가 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주씨는 쾌히 승낙하고 자기 아버지 머리는 왼손에 지리박사 아버지 머리는 오른손에 들고 물속에 들어갔더니 과연 미륵이 있었다. 막상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미륵이 눈을 크게 뜨고 인상이 하도 험악하여 앞에서는 도저히 걸지 못하고 뒤로 돌아 부처의 뒤에서 걸고 나왔다. 기다리던 지리박사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미륵이 너무 무서워 뒤에서 걸었다"고 솔직히 말했더니 무릎을 치면서 그것도 당신의 복이라면서 당신은 웅천에 있지말고 멀리 떠나라고 하면서 서로 헤어졌다. 주씨는 그길로 멀리 떠나가 중국의 서울 근처에 도착했는데 산위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큰 능을 발견하고 그 능의 비석 뒤에서 쉰다는 것이 잠이 들어서 밤이 깊어서야 깨어났다. 그때 능 앞에 예쁜 처녀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처녀의 기도를 엿들으니 "아버지, 지금 오빠는 반란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꼭 오빠가 승리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자가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결국 주씨는 이 처녀와 인연을 맺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처녀는 당시 중국 왕실의 공주였다. 하루아침에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된 주씨는 어느날 궁궐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가 한 곳에 머무르니 용안과 옥이 있었다. 호기심에 용상에 앉아 왕관을 쓰고 옥새를 목에 걸고 있었다. 이 때 밖에서 왕자가 승리하여 이제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대관식을 하려고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주씨는 겁이 나서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서 떨고만 있었다.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선 왕자는 매우 놀랐지만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주신 천자라 생각하고 무릎을 꿇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고 천자로 모시게 되었다. 왕자는 대신이 되어 여러 대신들과 회의를 열어 정승을 임명했는데 추대된 정승이 다름 아닌 웅천에서 만난 지리박사였다고 하며, 자기 아버지 머리를 왼쪽에 걸었기 때문에 정승을 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 가야진사 양산시 전설 펼침메뉴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앞 낙동강 가야진사가 있다. 이 가야진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양주도독부에 있던 한 전령이 공문서를 갖고 대구로 가던 길에 이 곳 산막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전령에게 용 한 마리가 나타났다. 용은 남편되는 이가 첩만 사랑하고 자기는 사랑하지 않으니 첩용을 죽여 원수를 갚아주면 꼭 은혜를 갚겠다면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애원하였다. 전령은 용의 딱한 사정에 동정심이 생겨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 용이 시키는 대로 칼을 빼들고 남편 용이 첩을 데리고 논다는 용소에 가서 바위 틈에 숨어서 용 두 마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있다 갑자기 강물이 끓어오르면서 용 두 마리가 불쑥 솟아올라 오더니 서로 엉켜 희희낙락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겁에 질린 전령은 다급한 김에 앞뒤도 가릴 새없이 칼을 뽑아들고 그 중 한 마리를 향해 내리쳤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칼이 빗나가 숫룡을 죽이고 말았다. 남편 용의 죽음에 슬피 울던 용은 어쨌든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용궁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전령은 입었던 갑옷과 칼 투구를 벗어 던지고 용등에 올라 물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부터 용과 전령의 자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이 마을에는 재앙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용이 놀던 용소가 보이는 곳에 사당을 짓고 세 마리의 용과 전령의 넋을 위로했다. 그래 지금까지 매년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돼지를 잡아서 용소에 던지며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 성주사 창원시 전설 펼침메뉴

    창원 성주역에서 동으로 오 리쯤 가면 신모사(神母寺) 기슭에 성주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을 일명 "곰절" 혹은 "웅신사"라고 한다. 신라 흥덕왕 때에 위군 십여 만이 내침하여 왕이 신하를 모아 이를 격퇴할 계책을 의논하며 닷새를 지냈으나 묘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왕의 꿈에 신이 현몽하였다.  "지리산에 있는 무량화상에게 물어보면 위군을 격퇴할 것이니라." 그래서 왕이 사자를 보내어 무량화상을 맞아 신모산에 오르게 하였다. 스님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세우고 왼손으로 배를 치니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갑옷 입은 신병들이 출현하여 주위를 둘러쌌다. 위군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도주해 버렸다고 한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국사로 모시고, 이 절을 창건하게 하여 성인이 상주하는 절이라 하여 성주사(聖住寺)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에 이 절을 중건할 때에 본래의 절터에 목재를 쌓아 두었는데 하룻밤에 곰이 대들보감을 지금의 절터에 물어다 놓아서 지금의 절터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그뒤 성주사를 "곰절" 혹은 "웅신사(熊神寺)"라 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담당부서 : 문화관광체육국 관광진흥과  
  • 연락처 : 055-211-4611

최종수정일 : 201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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